한생곤 Han, Saeng gon

<평론>

■ 개인전 <어머니의 하루> 전시서문(백종옥)

살다보면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인연의 물줄기가 있다. 작가 한생곤의 소식도 잊을 만하면 불쑥 날아든다. 지난해엔 결혼, 이번엔 전시회 소식이다. 자주 마주쳐도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작가 한생곤에게는 수년 만에 만나도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툭툭 털어 내보이고 싶은 구석이 있다. 아마도 그의 생활과 사유와 작업이 하나의 호흡으로 진솔하게 일치되는 모양새가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리라.

계절이 바뀌듯이 작가 한생곤의 화두와 그림도 서서히 변해가는 것 같다. 1997년 무렵까지 그는 ‘거품’같은 삶이 너무나 무상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추상적인 화풍으로 풀어내었다. 그래서 그는 이때를 ‘포말(泡沫)의 시기’라고 불렀다. 무상과 절망의 심연 속에 희망의 씨앗이 들어있는 것일까? 그가 ‘분말(粉末)의 시기’라고 말한 1998년부터는 생의 무상함 사이에 자리잡은 현실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불태운 ‘가루’로써 화면에 구체적인 흔적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이후 작가 한생곤은 중고버스를 타고 전국을 떠도는 유랑생활을 하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 내재된 성스러움을 단순한 필치로 그려내는 데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유랑의 길 위에서 얻은 소소한 오브제들(연탄재, 기와, 술병 등)을 불로 태워 가루로 만든 뒤, 캔버스 안에 소생시키는 제의적 행위를 지속함으로써 그가 추구하는 삶과 작업의 의미를 새로운 단계로 심화시켰다. 작가 한생곤이 펼친 이러한 삶과 작업의 양태를 나는 ‘불교적 유목주의’라고 지칭한 바 있다.

지난 2006년의 개인전『가겟집』에 비해 이번『어머니의 하루』에서는 몇가지 흥미로운 변화가 감지된다. 우선 형식면에서 단조로운 색조의 소품을 주로 선보였던 가겟집 그림들보다 과감한 색채의 사용과 작품의 크기에 대한 고려가 눈에 띈다. 작가 한생곤은 지난번 『가겟집』전을 방문한 필자와의 대담에서 ‘우리 그림에 대해 재료부터 한약방의 약재처럼 탐구해보고 싶다’라며 향후 계획을 피력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한 생각을 이번 전시 작품들에서 시도해 본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주제의 중심에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의 ‘어머니’를 두어 인간 한생곤과 그가 행하는 작업의 정체성을 궁구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화두의 시작은 개인적이고 ‘어머니의 하루’라는 일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작가의 고민과 작품들의 지평은 보편적인 삶과 미감을 향해 열려 있다. 이를 역으로 보면 생의 보편성과 한국적 미감을 작가 자신의 부모, 특히 ‘어머니’로부터 모색해보려는 작가 한생곤의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이런 면에서 ‘반달 어머니’는 특히 주목된다. 집과 아기 그리고 나무가 있는 반달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을 그린 이 그림은 바구니 행상으로 아기를 키우고 가정을 꾸려가는 억척스런 어머니이자, 반달이 뜬 저녁 무렵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투성이 아낙네의 모습으로 보인다. 또한 반달모양의 작은 배와 같은 세상을 보살피는 ‘태고의 모신(母神)’ 이나 시간의 흐름과 생성의 의미인 ‘달(月)’을 관장하는 여신(女神)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는 일상적 삶의 서정성과 신화적 상징성이 함께 녹아들어 응축된 형상이다. 긴 유랑을 마치고 고향의 어머니 곁에 정주하며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 한생곤의 더듬이가 성스러움을 머금은 일상의 풍경을 넘어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관통하는 신화적 이미지로 향하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 작가 한생곤은 스스로를 ‘느려터진 놈’이라고 표현했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느림’은 삶과 작업에 대한 화두를 본원적으로 성찰하고 천착하게 만드는 든든한 원동력이다. 온갖 기교와 엽기적 상상력, 스캔들과 비즈니스로 소란한 미술계에서 그의 목묵하고 느릿한 붓질에 더욱 믿음이 간다.

<작가소개>

한생곤은 스스로를 ‘지구 위의 여행자’라 자처하고, 2002년 중고 버스에 ‘노란버스화실’을 마련 한 이후 지금까지 전국 곳곳을 돌며 유목민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글로벌화에 기인한 노마디즘(nomadism)이 현대 유목민을 만들어 낸다고 하지만 한생곤이 자처한 언뜻 낭만적으로까지 들리는 유랑 작가 생활은 글로벌 노마디즘과는 거리가 있는 만큼 녹녹치 않아 보인다. 한생곤의 작업에 대한 설명에 앞서 작가의 삶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한생곤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도 같은 여행과 ‘그리기’를 통해 그의 삶을 고스란히 그림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미디어 테크놀로지로 작업의 범위를 수평적으로 확장 시키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미술의 경계를 허물기를 시도하고, 현대 철학이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개념작업을 끌어가는 가운데 한생곤은 캔버스와 종이에 목탄 혹은 연필 등의 기본적인 재료로 색(color)을 가급적 배제한 회화와 드로잉 작업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