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천 Choi, Seungchun

<평론>

■ 최승천 개인전 전시서문 (장소미)

흐트러짐 없이 변치않는 나무처럼 – 최승천展에 대하여 – 본격적인 시작은 반가운 연노란 산수유 꽃들을 신호탄으로 개나리와 진달래가 움을 틔우기 시작하던 작년 이른 봄이었다. 한국의 목조형 예술 2세대 대표작가 최승천은 오랫동안 별러온 꿈이자 공공연하게 내비치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조각도를 잠시 내려놓고 붓을 든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작업에 조각도보다 붓을 드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 옳겠다. 그가 일 년반 남짓 준비해온 이번 작품들은 캔버스에 나무와 꽃과 새의 목조각과 아크릴 회화가 어우러진 이른바 목조각 회화이므로. 애초 그는 회화학부였다가 공예학부로 전과한 이력 때문인지 새와 나무를 주제로 한 그간의 조형작업도 회화적 요소가 기반이 되었고 작가이력의 중기부터는 목조형물에 아예 채색작업을 시도해온 터였다. 해서 목조각 회화가 사뭇 낯선 작업은 아니었건만 회화가 주가 되는 평면작업은 첫 시도였기에 용기가 필요했다.

나무를 절단하고 깎고 다듬는데 최적화된 작업실 안쪽에 본격적인 회화작업 공간을 마련한 뒤, 그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정원 안쪽에 오밀조밀 몰려있던 연산홍 중 몇 그루를 뿌리채 파내어 정원 한가운데로 분산 이식하는 작업이었다. 이후 웃자란 나뭇가지들을 쳐내고, 버석한 이파리들을 솎아내고, 음지에서 싹을 틔운 붓꽃을 양지로 옮겨 심고 극단적인 환경변화로부터 적응할 시간을 주고자 나무상자에 구멍을 뚫어 붓꽃을 덮어주는 등 생명을 돌보며 정원을 가꾸는 틈틈이, 드로잉 작업이 이어졌다. 영감을 얻기 위한 일시적 예열행위인줄 알았던 정원가꾸기는 작품을 준비하는 내내 병행되었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은 캔버스에서 다듬는 나무와 꽃들처럼 부단히 돌보고 가꾸어야할 존재들이었다. 역으로 캔버스의 나무와 꽃들은 과하게 꾸미지 않아야 하는 생명력있는 존재들이 되었다.

주제는 변함없는 나무와 새와 꽃이었다. 모든 예술이 기본적으로 철저히 자기이야기이듯 그의 작품세계도 온전히 개인의 기억과 이상과 인격을 대변한다. 요컨대 그의 나무와 새와 꽃은 감악산과 파평산 사이의 절벽으로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변에 자리 잡은 시골 고향 마을의 이상과 청년시절의 이상,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조화로운 조형감각, 소박하고 따뜻한 감성은 인간 최승천을 닮았다. 숙성된 기억은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했던가. 매봉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벽제동의 집과 작업실, 매일 자신의 손길과 눈길이 닿는 자연 속에서 그는 무르익은 기억들을 캔버스에 나무와 물감으로 펼치며 진정 즐거워하고 행복해하였다.

나의 시아버지 최승천 작가는 올해로 팔순을 맞았다.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고희를 훌쩍 넘었으니 웬만한 일은 너그러이 용서받을 수 있는 나이련만, 사십 평생 넘게 한 주제에 일관되게 천착해온 작가라면 준엄한 시간의 시험을 꼼짝없이 대면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기나긴 작가생활 동안 ‘나는 『새와 나무』를 주제로 평생토록 작품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무는 그만큼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간간이 피력하셨는데, 의례적 작가의 변으로 넘겼던 그 말들이 팔순을 맞은 현재, 더구나 새와 나무를 소재로 또 다른 시도를 하신 현재, 시간의 힘을 입어 돌연 예사로이 넘겨지지 않는 예술적 울림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번 전시회를 목표로 지난 봄, 작업에 착수하신 날부터 특별한 볼일이 있지 않는 한, 소위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작업에 바치셨다. 두 번의 봄과 여름, 한 번의 가을과 겨울을 거치는 동안, 전기 샌더로 장시간 나무를 다듬으며 미세한 나무 분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써서 때 아닌 눈사람이 되기도 하셨고, 손과 팔이 긁히고 베이는 것은 예사였으며, 저러다 탈진하시는 것 아닌가 염려될 만큼 벌게진 얼굴이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림을 완성해가며 진정으로 즐거워하셨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아버지의 작품이 볼수록 편안하고 따뜻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예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나만의 뚜렷한 취향을 가진 것이 전부면서 감히 이글을 쓰라는 황성옥 관장님의 권유를, 자칫 가족 간의 칭송잔치가 될 낯 뜨거움을 무릅쓰고 받아들였다. 새로운 시도에 쏟아 부은 아버지의 성실한 작가정신과 열정, 작품을 하는 내내 진정 즐겁고 행복해하셨던 천상 예술가의 마음상태, 사십 년간 천착해온 당신의 세계를 오롯이 펼쳤기에 행여 받게 될 새로운 시도에 대한 비판도 두렵지 않다던 심플함의 경지와 용기, 현재도 끊임없이 내비치시는 창작열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까닭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을 통해 질서와 조화 속에서 생동하는 자연, 소박함 속에서의 화사함, 자연과 하나된 작가의 세계가 많은 분들의 마음을 아늑하고 편안하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김복영

새와 나무는 곧 작가 자신의 생명의 흔적이자 시간의 흔적 그 자체로서 기술되고 표현된다. 나무는 차라리 생명과 시간이 아로새긴 흔적이자 다시 말해서 생명의 ‘내재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새는 이러한 내재율을 잉태시킨 사랑의 ‘모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최공호

‘따뜻하다’는 것은 참 좋은 느낌이다. 스산한 늦가을의 저녁에 돌아온 내 집의 아늑한 온기, 봄날의 양지곁에 내린 느슨한 공기의 질감도 통하는 느낌, 아버지 같은 분, 한결같이 웃음기 머금은 동안의 얼굴에 훌쩍 십년쯤 뒤에도 늘 그 자리에 계셔줄 것 같은 믿음을 주시던 분. 그분의 작품에는 늘 잔잔한 봄바람이 일고 따순 햇볕이 일렁인다. 자연을 노래한 작가는 숱하게 많지만 자연의 상징적인 기표를 구체적으로 붙잡아 당혹스러울 만치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 이경성

『새와 나무』라는 단일주제를 갖고서 이처럼 대담하게 제작세계로 뛰어든 것은 아마 최승천의 경우가 처음일 것이다. 새는 좌우대칭으로 여러 가지 형상을 좇아서 배치시키고 있다. 그의 아름다운 기능적 형태는 새에 대한 깊은 애정과 날카로운 관찰이 토대가 되어서 이룩한 미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주목해야할 것은 새의 표정보다도 그야말로 다양한 조형적인 변화를 보여준 나무의 표현이다. 나무라는 단일주제가 이처럼 풍부한 상상력과 환상적인 조형역량에 의해서 표현된 것은 최승천이 순수한 목공예가가 아니라 조형작가로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목공예가 최승천은 공예가라기보다는 목조각가로써 자기예술의 이상을 정착해나가고 있다. 동시에 그의 작품의 모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이기에 그는 올바른 눈으로써 새를 보아오고 나무를 느끼며 그와 같은 순도높은 작품세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어우러져서 사람들의 일상을 풍부하고 행복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 이일

최승천의 작품은 서로 간에 정연하고도 복합적인 관계를 짜가면서 끝없는 ‘반복의 판타지아’를 연출해보이고 있다. 우리는 최승천의 작품과 함께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또 다른 신선한 조형공간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