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문-불가능한 기억의 온전함

2015. 11. 18 ~ 11. 25

<불가능한 기억의 온전함>

조현문 개인전, 2015. 11. 18 – 11. 25, 아트 팩토리

임의적인 관심으로 인해 삶의 실재들을 분열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건전한 일이다. 우연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변형시켜, 그것을 찬미의 대상이 되도록 해보라. 이 방법은 훌륭한 효과를 갖는 것으로서, 흥분되어 있는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많은 사람에게 이 방법은 훌륭한 자극이 된다.” – 키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

죽음이라는 극단적 필연 앞에서 인간은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멈춰 본 적이 없다. 끝없이 과거를 되뇌고, 치열하게 현재를 느끼고, 열정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이 모든 인간의 노력은 문명을 만들었고 개인의 서사(敍事)를 삶 속에 각인시켜왔다. 기억된 경험은 과거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사유의 원천이었으며, ‘나’의 정체성의 증언이었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 기억은 늘 우리를 새롭게 하고, 세계를 각자의 감정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작가 조현문은 바로 이러한 자기 발견으로서의 기억에 주목한다. 몇 해 전 당한 불의의 사고로 짧은 시간 동안이라고는 하지만 기억 상실을 경험한 작가는 심각한 공포를 느꼈다. 현재의 삶을 지지해주던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고, 생존 시간의 연속성이 무참히 깨지는 것을 목격한 그는 매일 오가는 길과 무관심했던 일상 속의 오브제에 남다른 시선을 보냈다. 작가는 길바닥과 일상 물체들의 부분을 본떠 그것들을 실로 엮은 작업과 그것들을 기록한 사진까지 만들었다. 특히 그는 캐스팅된 부분들을 가볍고 쉽게 변형될 수 있는 재료로 제작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굳어지기 전에 형태를 유지하게끔 계속 만져줬다. 온전하게 그가 가졌던 기억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지만, 주재료인 알지네이트(alginate)는 굳으면서 점차 형태의 변형이 일어났다. 작가는 그것이 마치 쉽게 왜곡되고 편집되는 기억의 본성을 닮았다고 느끼면서 ‘불가능한 기억의 온전함’이라도 꼭 붙잡으려 한다. 이러한 행동은, 그가 느꼈을 기억 상실의 공포를 생각해 본다면, 큰 의미 없이 걸었던 길들이 거대한 의미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강박적으로 기억을 현재로 부르고 현재를 과거의 상태로 되돌린다. 공간과 시간이 교차하면서 작가의 경험은 단지 과거의 재생이 아닌 현재의 우연과 관계하며 임의적인 선택에 의한 창조물이 된다. 기억을 더듬는 순박함과 우연이 지닌 창조적인 힘이 모여진 각기 다른 출생지의 ‘길바닥’들은 작가에 의해 채집되어 꿰매지거나 매달려진 채 하나의 ‘표현’이 된다. 그리고 그 표현은 작가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로 인해 더욱 강렬해진 삶의 확인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조현문의 작업 방식은 다다(Dada)와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었던 아르프(Hans 혹은 Jean Arp, 1887–1966)의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회화가 마음에 들지 않자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뿌린 아르프는 얼마 후 바닥에 흩어진 종잇조각들이 만들어 낸 형상과 감정들에서 그가 여태껏 헛되이 찾던 표현을 발견하고 곧장 그 조각들을 주워 캔버스에 본 그대로의 상태로 붙여 재현했다. 이것이 아르프의 최초의 일루미네이션이었고, ‘우연 시리즈(série consacrée au Hasard)’의 시작이었다. 이 작품이 갖는 심오함은 그래서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닌 게 되며, ‘건전한 자극’의 형태로 흥미로운 것이 된다. 조현문의 기억도 아르프의 종잇조각들과 어쩌면 같은 동기를 지닌 시공간에 있다. 과거 안에서 작용하는 합리적인 서사의 연속으로서가 아니라, 실재의 임의적인 파편으로서 말이다. 길바닥에 흩어졌던 기억의 조각들이 캐스팅되는 순간 과거는 생생한 우연이 되어 묘한 긴장감을 제공한다. 즉, 과거의 파편으로서의 그것들이 실재의 감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기억이 존재할 수 없는 죽음의 영역은 그렇게 작가로부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난다. – 이재걸, 미술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