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영

산률 선우영 (1946-2009/ 평양)은 1969년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선우영은 졸업 후 서양화를 그리다가 1972년 조선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선우영은 당시 조선화단의 선두였던 정종여 (1914-1984/ 거창)에게 사사했다. 그는 1973년부터 만수대창작사에서 탁월한 창작능력을 발휘하며 천재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선우영은 1992년 최고의 인민예술가가 되었다.
잔인했던 한국전쟁과 엄중한 분단시대에도 순수하고 찬란한 한반도미술사가 있다. 위대한 역사는 험난한 삶과 피 끓는 예술혼을 불태우며 주옥 같은 걸작들을 토해낸 진채진경산수의 거장 선우영과 몰골화의 거장 정창모 (1931-2010/ 전주)를 배출했으며 그들의 작품들은 한반도미술사의 꽃이다. 선우영은 <2005년_제8회 베이징 국제미술제>에서 <백두산 천지> 작품으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선우영은 그만의 지평을 확인했으며 북의 국보인 그의 걸작들은 비운의 한반도를 목격하며 삼엄한 분단의 장벽을 넘었다.

선우영은 독창적인 진채진경산수화 기법을 완성하기까지 조형적 안목과 정서적 감정을 정화하는데 오랜 세월과 피나는 탐구과정이 필요했다. 선우영은 전통적인 화법을 벗어나 현대적인 강렬한 색상에 거칠고 거침없는 붓질과 세밀하고 섬세한 기법으로 발색이 장엄하고 사실적인 새로운 장르의 미술세계를 개척했다. 그것은 선우영의 독보적인 화법적 특성과 우월성을 보여주는 징표다. 선우영은 화면에서 미세하면서도 거칠고 활달한 붓질로 자그마한 빈 구석도 없이 침착하게 구체적인 작품을 형상했다. 선우영은 작품에서 중경과 원경의 묘사가 보다 구체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는 작품에서 큰 것을 위해서 부분적인 것을 생략한다는 논리는 없으며 오히려 큰 것을 위하여 부분적인 것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은 직관예술인만큼 사람들의 눈에 들어야 하고 볼수록 새로운 진미가 느껴져야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여러 미술형식이 섬세한 형상을 수많이 창조해왔지만 선우영의 작품 같이 밀도 있는 세화를 창조한 예는 아직까지 없었다. 선우영의 작품은 사실주의 창작방법에 기초하고 있지만 대상의 본질적인 측면을 깊이 파고들어 성격화함으로써 이여의 창작방법이 추구하는 형상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선우영의 작품은 정서적 감정을 가지고 정화되어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더욱 강조되고 불필요하고 부차적인 것들은 생략된다. 따라서 필수불가결의 부분과 요소들은 더욱더 선명한 개성을 드러내며 아름다운 모습과 자태가 부각한다.

선우영은 2009년 8월 7일_ 63세에 아버지 같은 정창모를 남겨두고 요절했다.

신동훈 / 미국조선미술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