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정 개인전 – Incompetent Seeing 무능한 시선

2017. 3. 14 – 3. 22 (일요일휴관)

예술의 가치를 옹립시키기 위한 조건들

홍경한(미술평론가)

동시대미술에서 재료가 주는 신선함은 별로 없다. 폐타이어로 조각을 하던 살아 있는 생물을 박제화 하던, 자신의 신체를 조각조각 조각내어 영상화하던 결국 재료는 내용을 떠받치는 효과적인 수단일 뿐 그것 자체로 예술적 가치를 매기진 않는다. 더구나 우린 이미 재료의 충격을 숱하게 경험한바 있다.

일례로 마크 퀸은 유명한 <셀프>(1991)라는 작품을 만들 때 자신의 피를 재료로 했고, 데미안 허스트는 상어와 염소, 젖소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연이어 발표했다. 심지어 이탈리아의 피에로 만초니는 자신의 배설물을 90개의 깡통에 담은 <예술가의 똥(Artist's Shit)>(1961)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가의 특별함(비평가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니며 기획자도 아닌)과 더불어 예술과 자본주의, 대중과 시장에 대해 풍자했고, 진짜 배설물이 아니었음에도 ‘똥’이라는 명사가 주는 재료적 측면에서의 충격은 작지 않았다.

이처럼 미술에 있어서의 재료는 너무나 풍부한 선례를 남기고 있어 어지간한 게 아니라면 예술적 의미를 덧대는 보조수단일 뿐 그 이상의 가치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지각적 경험만으로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선언과 다름 아닌 워홀의 <브릴로 박스>(1964)를 비롯해 제도화하고 형식화한 미술 시스템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담고 있을뿐더러, 회화성에 대한 부정과 ‘비예술적 대상’의 일관된 예술적 전용, 미술에 대한 경계를 무력화한 뒤샹의 발칙한 아이디어가 핵심인 <변기>(1917)는 사실상 이제 고전이 아니던가.)

오늘날 미술에 있어 중요한 건 재료의 특이성보단 작품이 무엇을 담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공유되며 얼마만큼 해석의 여백이 있느냐이다. 여기엔 그저 시각적 결과물 없는 맥락만 존재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권혜정의 작업에서 눈에 띄는 건 비닐이라는 재료를 통해 내러티브가 완성된다는 점이다. 하찮고 쉽게 소비되며 편리하게 사용되어 존재가치마저 희미한 ‘비닐’을 인간 약자의 모습으로 치환해 놓고 있다. 물론 뱅크시의 그림이 연상되는 소녀로 보이는 한 인물이 풍선을 들고 있는 ‘No future’를 포함해, 일본과 한국의 정치적 소재로 이용되는 위안부상을 담은 작품까지 그의 비닐은 그야말로 약자에 대한 시선을 충분히 대리한다. ‘약자’에 대한 짙은 관심의 표명이라 해도 그르지 않는 그의 비닐과 주제의식 간 연관성은 꽤나 밀착도가 높다.

다만 작품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유와 해석의 여지는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일단 그의 몇몇 그림들은 설명이 주를 이루기에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금방 이해가 된다. 작품 속 텍스트와 형상만으로도 인지적 측면이 강해져 작품 앞에서 머뭇거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대에 대한, 세태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눈치 채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이는 마치 보도사진과 현대사진만큼의 거리감을 준다.

그의 그림이 혹은 스타일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장르의 사례지만 아타킴 작업에 대한 미학적 고찰이 요구된다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을 통한 인간 성찰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매우 긴요한 메시지를 남긴다. 둘 사이의 구분과 인위적 차이를 애써 명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재료를 넘어 내용과 깊이 있는 해석을 담보하기 위한 다양성의 시도는 주문할 만하다. 재료와 형식은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트라바니자의 상호관계적 행위든 이미지 과잉 시대에서 그 이미지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티노 세갈의 형식이든, 여러 장르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낸 피나 바우쉬든 내용을 위한 자유로움은 보다 확장되고 구축되어야 한다. 특히 권혜정의 ‘시선’을 낮게 평가하지 않기에 이 확장과 자유로움은 향후 보다 유의미한 지점을 생성할 수 있는 기초가 되리라 여긴다. 불완전하고 부조리하며 부당함이 지배하는 이 일그러진 시대 및 사회에서 누군가는 발언해야 하고 그 맨 앞에 항상 예술가가 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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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정당한 노력의 댓가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구도 안에 우리는 있지 않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는 모순된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로 위치하지 않으려 사람들은 점점 이기적이고 이중적으로 변해간다. 부조리가 만연하고 상식은 무너지고 금력과 권력의 야합으로 거칠것 없이 모든 것이 가능한 죄악된 사회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것이다.
평범한 악이 우리 안에 잠재하고 있다. 어둠은 실체가 없다.
어둠을 이길 힘은 오직 빛 뿐이다.
실체가 있는 빛의 존재로 어둠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이다. 악도 역시 그렇다.
선함이 부족하거나 없는 상태다.
세상이 어둠과 같은 악의 모습을 더해 갈수록 우리는 선이라는 빛으로 세상을 더욱 비추어야 한다.
진정한 약자는 빛나는 그런 존재이다.    – 권혜정 작업노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