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옥희 개인전

2016. 8. 11 – 8. 30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작품 – 황옥희
글/ 박준헌(미술이론)

최고의 작품은 말없이 바라는 것 없이 무언가를 주는 작품이다.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최고의 신뢰는 말없이 바라는 것 없이 주는 것이다. 때로는 오히려 많은 말과 설명이 오해와 불신을 야기하는 것처럼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과도한 철학이나 표현, 서사가 작품이 가지는 진면목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진정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고 깨달음을 얻으려면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헛것의 세상이다. 식자(識者)들은 근사하게 이러한 세계를, 지금의 세상을 이미지나 환영(幻影)이라는 철학을 통해 말들 하지만 결국은 헛것이다. 헛것의 세상은 눈의 세상이고 눈에 의지하는 세상이다. 때문에 이러한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신뢰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세상이 예술(회화)로부터 진보되어 사진과 극장에서만 경험하고 여기에 가둬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컴퓨터의 출현과 비약적인 기술과 문명은 모니터 밖의 세상까지도 실체가 아닌 이미지의 환영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러한 헛것의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을 것인지를 자문하지 않는다면, 넘치는 다가오는 헛것의 쓰나미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이러한 조짐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헛것의 세상, 지금의 세계에서 황옥희의 작품을 통해 어떠한 질문이 가능한지를 타진한다. 얼핏 그의 작품을 험준한 산맥이나 산야를 과감한 색감과 터치를 통한 표현 그리고 여기서 드러나는 마티에르 등등의 표면적인 것을 이야기 한다면 이 역시 헛것은 아닐지라도 작품의 실체라 말할 수는 없다.
작품에서 보이는 더 없이 깊고 어둡고 검은 산. 검정의 숲을 이룬 산맥이지만 그 산은 고요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며, 그래서 애써 슬프다. 다시 말하면 화면의 검정과 무채색들은 그렇게 고요한 검정이고, 부드럽고 따뜻한 검정이며 그래서 애써 슬픔을 참는 검정이고 무채색이다. 그렇기에 단단하고 의연하다. 그의 작품을 보이는 것에만 의지하면 단순한 검정과 무채색의 혼합에 의한 산맥이고 숲이겠지만 마음으로 본다면 어두운 산맥 너머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단단해 지고, 그 단단함이 활활 타오르는 슬픔이 있다. 그는 헛것의 세상에서 자연이라는 현실을 통해 비극적 인식을 제공한다. 그의 화면은 그렇기에 가치 있다. 마음의 눈으로 읽을 때만.
그의 작품을 통해 보이는 것의 믿음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알 수 있다면, 묵묵히 잘 버텨내는 사람을 존경하고,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그의 작품의 실체에 첫 발을 디딘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리는, 자기에 대한 엄정함과 예술적 치열성이 경이로운 그의 작품을 통해 몸이 겪어야할 고통을 알 수 있으며, 이렇게 생산된 작품이 꼭 어떤 평가를 받거나, 훌륭하지 않더라도, 남보다 약점이 더 많다고 하더라도, 이해받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면 다시 한 걸음을 더 나아간 것이다.
그의 작품이 일고의 화려함이나 가식, 꾸밈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 허허로운 공간에서 진정으로 나라는 헛것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작품이 가지는 진정한 힘이다.
그의 회화가 자연을 소재로 한 다른 작가의 작품들과 달라 보이는 이유는 과감한 화면의 구성이나 그 만의 자연스런 기법이나 투박하고 거친 색의 사용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익숙한 현실의 자연처럼 보이지만 그 너머에는 자신의 기억을 관통한 시간들과 한 때는 친숙했으나 이제는 낯설어진 모든 억압된 욕망이 자리한다. 불가능하지만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그의 치열한 작가적 상상력과 그래서 구축한 그의 화면은 현실과 비현실, 나와 너, 정상과 비정상을 가로지르는 어떤 공간이고 사이이며, 틈이자 여백을 만들어 놓았다.
다시 우리는 그 여백 안에서 묻는다.
그 헛것의 세상이 어떠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