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윤택 – 기억 되(하)는 풍경

2014. 7. 9 – 7. 30

사윤택의 ‘움직임’이 의미하는 것

현재까지 사윤택의 그림 속 주인공은 ‘움직임’이다. 그것이 시간의 움직임이건, 시공간의 움직임이건, 또한 몇 초간의 짧은 움직임에 관한 것이건, 끝없이 계속되는 움직임이건, 대상의 움직임이건, 주체의 움직임이건, 그의 회화는 움직이는 것에 주목한다. 시간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자주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소재는 공이다. 공은 수년간 지속적으로 그의 그림 속에서 사건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작은 공의 예기치 않은 움직임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 그것은 작은 변수들이 큰 각도의 변화를 결과적으로 일으키기도 하는 세계의 우연성과 필연성에 대한 은유이다. 공이 솟았다가 중력에 의해 낙하하는 것은 필연이지만, 최초에 주어진 힘의 방향을 좌우하는 공기의 움직임이나 낙하지점에서 공의 타격에 영향을 받을 대상의 존재는 우연이다. 사윤택이 공의 움직임으로 화면 안에서 반응을 일으키는 최초의 방식은, 다소간의 유머 감각이 개입되어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 산뜻하고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정지된 화면에 움직임을 부여한다는 어찌 보면 심각하게 보일 수도 있는 도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실험들을 어렵지 않게 데려다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한 형식적 논의를 피해 내용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19세기 말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가 연속 촬영 기법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대상들, 이를테면 달리는 말이나 펜싱선수 등의 움직임의 순간들을 이차원 평면에 고착시키고자 했던 실험에 영향을 받아, 현대의 본질을 속도로 보았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이 한 화면에 대상의 움직임을 중첩되는 선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개발했는데, 사윤택이 화면 속에 움직임을 표현하는 방식 자체는 이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형식면에서 이들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사윤택은 미래주의자들의 겹치기 방식에 과장된 원근법을 부여하여 날아오는 공이 화면 밖에 있는 관객에게 육박하는 듯이 보이게 하는 등의 박진감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움직임의 ‘의미’에 대해서라면 사윤택의 화면과 백년전 미래주의자들의 동세가 전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윤택은 자신의 화면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움직임을 ‘일시적 발작’, ‘순간적 일탈’ 등의 언어로 묘사한다. 실상 움직임은 세계의 필연으로, 지구의 공전과 자전 속에서 인간은 세계의 거대한 움직임에 따라 일상의 속도를 계획하고 조절한다. 그런데 사윤택이 주목하는 것은,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움직임을 거스르는, 발작적이고 일시적이며 예기치 않은 움직임들인 것이다. 그는 움직임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아무것도 아닌 소소한 움직임들이 만들어내는 궤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유약하여 깨지기 쉬운 개인들에게 관심이 있는 듯이 보인다. 지나치는 한마디 말을 곱씹고 우연하게 본 한 순간의 이미지에 매혹되는 개인, 나와 우리의 말해지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관심 말이다. 그가 더 복잡하게 그려내는 화면들에서는 시간의 움직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공간의 움직임이 함께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한 눈에 들어올 수 없는 공간들이 한 화면에 구성되고 그 안에서 기물들이나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표현들이 복잡하게 생성되는 작품들이 그것이다. 과거 동서양의 작품 속에서 따 온 풍경과 인물들이 맥락 없이 차용되기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당혹스럽게 하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에서, 화면의 구심점은 대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풍경 속 어느 구석에 이젤을 펴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화면 속에 그려진 기물들을 동시적으로 그림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초현실적 이중 구성으로 나타난다. 그림을 그리는 나를 그리는 그림을 그리는 나…식의 액자 속의 액자 구조를 가진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화가의 모습은, 안경을 쓰고 체구가 작은, 그러나 길게 뻗은 팔을 유연하게 휘저으며 그림을 완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학습에 몰두하는 소년처럼 열중해 있는 모습으로, 어딘지 앞뒤가 꽉 막힌 너드(nerd)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 인물은 의외로 사윤택의 자화상으로 의도된 것이다. 실제 사윤택 작가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림 속에 등장하는 화가가 사윤택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여기기는 쉽지 않다. 사윤택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달리, 키가 크고 부리부리한 눈에 곱슬머리를 가진 강한 인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여성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남성 화가보다 더 활발하고 생기 있어 보이는 이 여성화가 역시 사윤택은 자신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바, 이 인물들은 ‘자화상’이라기보다는 ‘자아상’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 싶다. 물론 여성과 남성을 오가는 이러한 자아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보는 이의 다층적 해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이든 아니면 작가의 내면과 연관된 표현이든, 정신분석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일차적인 접근법이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소년이든 여성형이든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화가의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에 집중해서 보았을 때 쉽게 발견되는 지점은 그들의 전능함이다. 화면 속 전능함, 그것은 붓을 든 팔이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표현에서 뿐 아니라 실제로는 만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만나게 하는 내용의 그림들에서 주로 화가의 모습이 함께 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화가의 손에서 펼쳐지는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 그러한 시공간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세계의 필연적 법칙들이, 장난감 마을을 만들었다 부수고 그 속에서 개연성 없이도 인물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처럼 쉽게 경계가 사라지고 변형되고 전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능함이 화면 안에서의 이야기임을 그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화가의 그림은 프레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현시하며, 프레임 밖에서 전능함을 발휘하는 화가의 모습조차 프레임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가는 프레임의 트랩에 갇혀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화면 밖으로 빠른 속도로 질주하지만 그는 다시 반대편 화면으로 돌아 나온다. 이것은 그림의 한계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림 안의 무한성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사윤택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물들은, 죽을 때까지 춤을 추어야 하는 분홍신의 주인공처럼 화면 속에서 계속 움직여야 한다. 날아오는 공을 뒤통수에 맞는 사람도, 하늘을 가르며 다이빙을 하는 사람도, 전력을 다해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그림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제 운명을 산다. 이러한 지점에서, 사윤택의 그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리적 효과를 끌어내게 한다. 그의 화면 속 기물이나 인물들이 가지는 한계는,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술에 걸린 듯 이유를 모른 채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닌 현실의 인간들은, 사실상 자신의 근원이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혹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산다. 효율성의 미망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에너지를 소진하여 자신의 사용가능성을 극대화시키려 매진하는 가운데 한 생애가 흘러간다. 사윤택이 그리는 트랩에 갇힌 인물들은, 좀처럼 오지 않는 약속된 미래를 기다리며 제자리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우리를 닮았다. 그러나 그의 화면 속 주인공인 ‘움직임’은, 현재를 계속 활동시키는 움직임,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적극적 움직임이다. 그의 화면에 담긴 아주 짧은 순간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어느 것도 멈추는 일이 없는 것 같은 이 세계 속에서, 순간의 움직임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이루는 시간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심리적 출발선에 선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 이윤희